포르쉐 911 카레라 시승기
영타이머라 할 수 있는 포르쉐 911을 시승했다. 1997년부터 2004년까지 생산되었던 제5세대 911, 코드네임 996이다. 필자가 태어난 해, 00년도를 관통하는 모델이었다. 포르쉐의 20세기와 21세기를 동시에 겪였던 차종이다. 사변적으로 느끼기에는 1세대 포르쉐 901보다도 생소한 모델이 아닐까 싶다. 물론 901의 실물은 접해본 경험이 없긴 하지만, 1세대 911이라는 의의 하나만으로 많은 대중매체에서 접해볼 수 있었다. 그 이후의 930부터 964, 최후의 공랭식 포르쉐였다는 993까지 특유의 감성을 기억하고 회자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도 993과 그 이전의 포르쉐를 마주하면 압도되는 고풍스러운 멋에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본인도 그랬다. 클래식 포르쉐 하면 930과 같은 포르쉐의 ‘전형’과 같은 올드카들을 먼저 떠올렸다. 21세기의 포르쉐는 워낙 베리에이션이 다양해졌다 보니 그저 ‘부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경향이 있다. 물론 과거로 갈수록 진정한 부의 상징에 가까워지겠지만, 아예 구경조차 힘든 ‘이상향’에 가까운 자동차였을 법 하다.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가질 수 없는 극소수만의 전유물이라 할까? 아무렴 부의 상징에 가까운 포르쉐는 첨단 기술을 내세우는 섀시 성능과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그리고 수려한 외관 디자인으로 꾸며져 있을 것이다.
포르쉐 996 디자인
20세기와 21세기를 관통하는 996은 딱 그 경계에 있다. 모호하다는 표현이 제격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정통파 911도 아닌 것이 화려함과 기술력을 앞세우는 하이테크 911도 아니다. 당시 자금난에 허덕이던 포르쉐의 시각에서도 다소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었을지 모른다. 박스터와 헤드램프나 대시보드를 공유하는 등 원가 절감 요소는 물론 자동화 공정으로 원가를 줄여나가고자 했고, 또 밸런스 개선과 환경 규제 등 많은 이유로 수랭식 엔진을 탑재했다. 결과적으로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며 경영 측면에서는 성공했다고 한다.
근데 보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보니 996의 그런 스토리 하나하나가 각별한 역사처럼 느껴진다. 아무렴 911은 911이었다. 911의 화려한 역사 속에 996만이 지니고 있는 이야기들, 흥미로운 주제였다. 거의 신차급으로 보존된 전기형 996을 마주하고 있으니 마치 25여 년 전으로 돌아간듯 싶었다. 당시 1세대 박스터와 공유했다는 헤드램프 디자인, 911 라인업 중에 유일하게 원의 형태를 보여주지 않는다. 많은 비판을 받았나 보다. 그래도 이전 세대 993에 비해서는 더욱 매끈하게 공기를 다룰 수 있어 보인다.
포르쉐의 백미는 리어 쿼터 뷰라고 생각한다. 상당한 볼륨이 강조되는 리어 펜더와 이상적인 ‘쿠페’ 형태의 루프라인이 정말 매력적인 디자인으로 빚어져 있다. 너무 예뻤다. 역시 911이구나 싶었다. 완만한 각도로 누워있는 리어 윈드실드와 한 짝의 와이퍼가 특유의 멋을 자아내기도 한다. 엔진을 차체 뒤에 배치하면서 라디에이터 그릴도 뒷부분에 자리잡게 되었다. 어감부터 멋스러운 ‘카레라’ 엠블럼, 가장 기본적인 사양이지만 그만큼 5세대 911의 순수미를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심플하게 튀어나온 머플러 팁까지 매력을 더한다.
포르쉐 996 카레라 인테리어 디자인
실내 디자인에도 곡선이 다채롭게 적용되어 있었다. 계기판을 감싸는 비너클 라인이 센터페시아까지 연결되어 있고, 센터페시아에 자리 잡은 카세트 플레이어, 각종 오디오 수신 버튼을 보면 오래된 자동차라는 점이 체감 간다. 놀랍게도 에어컨은 오토 에어컨, 심지어 메모리 시트나 스티어링 휠의 버튼식 수동변속 기능까지 그 시절의 고급 스포츠카 답게 옵션은 풍부했다. 포르쉐의 특징 중 하나로 시동버튼이 운전석 좌측에 위치한다. 특이하게도 창문 레버는 센터 콘솔에 위치하고 있었다. 스포츠 쿠페가 그렇듯 2+2시터, 2열은 짐 공간에 가깝다.
시동을 걸면 묵직한 배기 사운드가 들려온다. 낮게 깔리는 중후한 소음, 특히 엔진 사운드와 배기 사운드가 모두 차체 뒤편에서 들려온다는 점이 새롭다. 실린더 뱅크각이 180도로 수평대향 특유의 회전 질감이 있다고 하는데, 사변적으로 큰 체감이 가지는 않았다. 그저 부드럽고 즉답적인 비교적 고배기량 자연흡기 엔진의 감성이다. 그나마 포르쉐가 수랭식 트윈 캠 엔진을 채택하면서 회전 특성 자체는 대중적이고 다루기 쉽게 변화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자동변속기를 조절하면 계기판의 변속기 경고등도 함께 움직인다.
크리핑은 경쾌하지만 스티어링 휠이 굉장히 무거운 편이다. 예상은 했다. 첫인상부터 딱딱함이 느껴지는 하체가 역시 스포츠 쿠페구나 싶었다. 수평대향 6기통 엔진의 배기량은 약 3.4L, 최고출력은 300마력, 최대 토크는 35.7Kg.M 이다. 공차중량이 1.4톤에 못 미친다. 변속기는 ZF 사와 협력한 5단 팁트로닉, 토크컨버터 방식이다. 제원표 상의 성능, 특히 중량 대비 출력은 최근 출시되는 자연흡기 스포츠카와 비교해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만큼 빠져있는 전자장비들은 다수 있을 것이다.
엑셀을 밟는 대로 부드럽게 나아가는 주행 질감이 참 좋았다. 단단한 승차감과 핸들링은 다소 체력 소모가 있겠지만, 신뢰할 수 있는 자동차라는 피드백을 지속적으로 전달해 주는 듯하다. 다소 오래된 자동차인 만큼 풍절음이 유입되지만 힘차게 엑셀을 밟아볼 수 있었다. 사소한 충격도 없이 부드러움을 보여주던 변속기는 급격한 저단 변속을 한다. 계기판 상의 레드존은 7000RPM 이상, 고 RPM 영역에서 느껴지는 카랑카랑한 사운드와 가벼운 차체를 자극하는 변속 충격이 긴장감과 재미를 더해준다.
새삼 자동차의 성능이 많이 발전해 왔다 한들 출력에 비롯하는 피지컬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속감이 가히 폭발적이다. 특히 재빠르게 반응하는 팁트로닉 변속기의 완성도가 훌륭했다. 차체는 가볍게 달려나가지만, 하체는 묵직하게 조율되어 있다는 점도 인상 깊은 부분이었다. 그 때문인지 속도감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스포츠 쿠페인 만큼 클러스터에는 RPM 게이지가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으며, 수치상의 속력은 아래 디지털 계기판으로 확인할 수 있다. 스티어링 휠의 스포크에는 버튼식 변속기가 위치한다.
꽤나 오랜 시간 주행을 하다 보니 풍절음과 부밍에도 적응이 된다. 불쾌하거나 거슬리는 소음, 진동이 아니라 꾸준하고 무게감 있는 울림이다 보니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911이라는 선입견에 감성 요소로 받아들였을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올드카는 그래도 된다. 그래야 한다고 996이 저를 설득시키고 있다. 오래된 자동차 특유의 딸깍이는 방향지시등 소리와 레버를 누르는 느낌이 즐겁다. 사이드미러로 엿보이는 매혹적인 숄더 라인, 프레임리스 글래스의 매끈한 반사광, 그리고 뒷유리로 비치는 따스한 햇살은 낭만의 정점이었다.
결과적으로 주행하는 느낌 자체는 현대 시대의 스포츠카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세세하게 따져보면 출력 대비 탄소 배출량이나 동력 손실이나, 메카트로닉스 측면의 여러 기술들이 부진할 수 있겠지만, 보통의 운전자인 본인이 느끼기에는 나름 익숙했다. 최근 생산되는 자동차였다면 핸들링을 비롯한 섀시 감각들이 전자제어를 통해 가벼워질 수 있겠지만, 낭만을 위해 911을 타는 순간만큼은 무의미한 기능일 것이다. 보다 극한의 주행이나 와인딩 코스에서는 분명 차이가 느껴질 것이다. 하나 일반적인 주행에서는 고급스러운 감각의 스포츠 쿠페였다.
포르쉐 996 카레라 시승기 결론
클래식 카는 특히나 석양이 지는 풍경 앞에서 아름다움이 증폭된다고 생각한다. 복잡한 주름이 아닌 자연스러운 면으로 구성된 디자인, 그 실루엣을 가장 직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20세기와 21세기의 경계에 있던 996, 충성고객에겐 역변한 911일지 몰라도 시장의 관점에서는 ‘혁신’이 맞을 것이다. 보다 편리하고 다루기 쉬운 스포츠 쿠페였고, 매끈하고 자연스러운 디자인을 지녔으며, 생산성도 훨씬 나아졌다고 한다. 결국 성공의 상징으로 평가받는 ‘포르쉐’가 존재하는 한 996의 투자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할 수밖에 없겠다.
글/사진: 유현태